자이언 캐년의 장쾌한 산마루길 EAST RIM TRAIL.
자이언 캐년의 장쾌한 산마루길 EAST RIM TRAIL.

자이언의 아침은 짙은 구름사이를 비집고 나선 힘겨운 햇살이 거대 직벽에 비끼면서 붉은 빛을 발하며 다가옵니다. 늑장을 부리며 한없이 느긋한 봄 산. 기다림에 초조한 산객들의 분주한 이른 발자국 소리에 그때서야 게으른 기지개를 켭니다. 먼저 깨어난 산봉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찢겨진 옷자락처럼 펄럭이는 하얀 안개가 나무사이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시닉 드라이브를 달리는 무연 전기 버스를 타고 종점인 Temple of Sinawava로 향합니다.

원래 Narrows라는 14마일 구간을 걸으며 자이언 계곡으로 흐르는 버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바위도 오르고 물도 건너며 특이한 경험을 해보는 캐녀니어링(Canyoneering)을 할 예정이었으나 최근 잦은 비로 강물의 수위가 높아져 트레일을 폐쇄하여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목적지를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Weeping Rock 정차장에 내려 오늘 즐기게 될 East Rim 구간을 오르기 위해 산길을 쫒습니다. 이 구간은 자이언 협곡의 동녘에 준봉마다 이어진 산마루 길로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광이 압권인 곳입니다. 버진 강이 휘돌아 협곡 구석구석을 지나며 매사를 간섭하는 수다쟁이 뺑덕어미처럼 풀이며 꽃이며 바위며 모두에게 안부를 묻고 흐르고 있습니다.

봄의 기운이 가득한 산하에는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이 온갖 자연의 소리에 담겨져 계곡을 채우고 있습니다. 미끈하게 뻗어 오른 거대 관목들이 도열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 길섶에는 아침 햇살이 번져있다 우리들의 경쾌한 발길에 채여 흩어집니다. 찬란한 자이언의 아침햇살은 건너편 거대 직벽에 넓은 그림자 선을 그으며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 등반이 시작됩니다. 허벅지가 묵직해지는 경사도를 느낍니다만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마음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묵은 일상에서 부산물로 남겨진 삶의 찌꺼기를 담아온 배낭을 이미 모두 비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넓은 목초지에는 산꽃들이 도란도란 밤새 못한 얘기들을 나누며 재잘거리고 있습니다. 가장 화려한 색으로 아침을 자랑하고 싶은 듯 선홍의 빛으로 자태를 뽐냅니다. 이런 꽃길을 따라 바람의 노래를 듣고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걷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고행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즐거운 산행이라면 몇날을 쉬임없이 걸어도 지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이어도 워낙 높은 산이라 올라도 올라도 턱없이 멀어만 보입니다. 한 덩어리로 된 바위틈을 이용해 가까스로 낸 길에는 안전을 위해 난간이 만들어지고 쇠사슬을 연결해 두었습니다. 일렬로 나란히 길게 늘어선 우리 일행의 모습은 흡사 하늘가는 길을 오르는 행렬 같기만 합니다. 장엄한 행렬입니다.

아이스 캐년이라 별칭을 얻고 있는 협곡을 지나며 송알송알 맺힌 땀을 식히고 다시 들꽃들의 인도로 일차 정상에 오르고 이제 마지막 정상을 향한 힘든 마지막 여정이 다시 우리를 기다립니다. 푸른 잉크 위에 뿌려진 하얀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계곡을 지나온 미풍이 우리의 발길에 채입니다. 그래도 이런 명경을 두고 그냥 갈수는 없는 법. 단체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연령층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워합니다.

산정을 오르는 길은 통바위였고 위험을 줄이려 깎인 바위는 수많은 발길에 무디어졌습니다. 그 켜켜이 쌓인 세월 위를 걸으며 우리도 한때 물이었고 돌이었고 바람이었음을 생각하고 또한 훗날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순환의 법리를 터득하고 무욕의 땅으로 오르려 합니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푸른 숲보다는 앙상한 가지의 헐벗은 관목들이 더 많이 나지막이 깔려 있습니다. 길이 너무 가파르니 봄이 아직 올라오지 못했나 봅니다. 정상의 길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가라는 암묵의 지시 같아 보입니다. 인생길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모든 것을 챙기며 가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산행의 묘미는 뒤를 돌아보는데 있다 합니다. 숨 가프게 올라온 지난 발길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내 자신이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발길을 멈추고 되돌아보아야 함을 오늘도 이 산에서 배웁니다. 되돌아보면 그 짧지 않은 여정이 한 세그멘트마다 역사가 되어 한 가닥씩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청명한 자이언은 산과 하늘과 구름이 맞닿아 바다를 이루고 그 위에 섬처럼 떠있는 산봉과 능선들로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냅니다. 여전히 저만치서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는 구름들. 바람이 밀어내도 이들 구름도 우리들처럼 산이 좋아 오랫동안 산에서 머물고 싶은 모양입니다. 자이언의 산정들은 고만고만한 높이에 모두 목초지로 형성되어있고 신의 거처같은 메사가 하나씩 지어져 있습니다. 2천 고지의 고원평원의 특징인데 이 플레토에 버진강이 흐르며 수백만년 깎고 깎아 지금의 이 협곡이 생성되었음을 반증합니다.

이 가혹하도록 척박한 산정에서 선인장들이 어렵사리 꽃을 피워내는 이 계절. 그러기에 더욱 치명적인 아름다운 개화가 돋보입니다. 드디어 최종 정상인 전망대에 섰습니다. 바람이 가장 먼저 나와 배웅을 하며 우리를 반깁니다. 발아래는 자이언 협곡의 모든 풍광이 안개구름 너머로 장쾌하게 펼쳐집니다. 촉촉이 젖은 자이언의 기암괴석들이 끝없이 이어진 장대한 파노라마. 산 너머에는 또 산이 있고 숲 건너에는 또 숲이 있습니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굵은 선의 산세가 더없이 믿음직합니다. 이 고난의 등반에서 마지막 얻는 선물. 기막힌 자이언의 자연 풍광들. 가슴이 벅차 심장이 멎는 듯한 감흥에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신음소리를 내고 맙니다. 땀에 젖은 몰골로 서로를 격려하며 산과 함께 젖은 동질감에 우리도 그 자연의 일부가 되어 동화되어 감을 그때서야 인식하고 우리들 마음이 한없이 열리며 넓어지는 풍요로움을 만끽합니다.

발아래 수직절벽. 모두 단체 기념 촬영을 하는데 젊은 서양인들이 부러운지 익살스럽게 다가와 함께 기념샷을 남기게 됩니다. 이 정상에서의 감상을 다시 접고 구름길을 걸어 우리들의 산정 만찬이 베풀어집니다. 한국인만의 열정과 의지로 짊어지고 올라간 도시락에 버너를 이용한 라면과 후식 진한 다방 커피까지. 산상 최고의 식사인데 후각을 자극한 우리의 맛에 타인종들의 부러운 시선에 온몸이 따갑습니다. 풀 한포기, 꽃 한 잎, 바람 한 점 까지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껏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고난의 수행 길을 기쁨으로 올라와 장대한 정상에 선 이 거룩한 순간에 바람은 바위산을 넘어 여전히 힘차게 불어오며 우리의 존재감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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